지난호보기 편집자에게
  
  
  
  
  
  
  
  
  
  
  
  
  
  
영성수련과 에니어그램   
글 김영운 작은교회 담임목사   

에니어그램을 현대 사회에 전수하기 시작한 굴지예프(1866~1949)는 영적 지도자로서 에니어그램이 성격 또는 인성을 발견하거나 파악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명백히 가르쳤다. 흔히 성격이란 말로 이해하는 것을 그는 세분화시켜서 거짓 인성과 참된 인성, 그리고 본성을 찾기 위해 영성 수련을 하는 수련인생 등으로 나누었다. 따라서 영성수련을 통하여 사람은 본래적 존재로서 참된 나를 찾아 나가야 하며, 여기서 또한 나를 세분화시키는데 여기에는 다섯 단계의 수준이 있다고 본다.

그 첫째는, 보통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수많은 나, 둘째는 관찰하는 나, 셋째는 기계적 삶에 저항하여 수련하는 나, 넷째는 모든 나를 통제하는 나, 그리고 다섯째는 영구적인 나로서 참된 나이다.
다른 개념으로 말하자면 의식상태의 네 단계로 나누는데, 첫째 잠자는 상태, 둘째 선잠 깬 상태, 셋째 자기를 의식하는 상태, 넷째 객관적 세계를 의식하는 상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잠자는 상태에 있다. 이 때의 사람들은 기계적인 삶을 살거나 환경이나 외부조건에 의하여 떠밀려 가거나 저항하며 살아간다. 본능을 따라 살기를 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장 과정에서 얻은 습관이나 인상이나 학습 등의 축적으로 형성된 성격에 맞춰서 살아간다.
둘째로, 선잠 깬 상태는 자신이 잠자는 상태를 느끼는 것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 상상의 세계로 빠지면서 현실 도피를 하거나 모르는 것이나 알 수 없는 것을 말하며 거짓말을 곧잘 하고, 되지도 않을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살아간다.
셋째로, 자기를 의식하는 상태는 보통 극히 위험한 상황이나 극단적인 감정(예를 들자면, 비탄) 상태에서 생긴다.
넷째는, 객관적 의식의 상태이다. 극히 드믄 경우라 할 수 있는 이 상태의 경우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을 꿰뚫어 본다. 우주적 의식이기도 하고 신적인 의식이라고도 표현되는 경우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사람의 일곱 단계를 생각하게 된다. 1번 단계의 사람은 본능 중심으로 생각한다. 물리적인 사람이다. 2번 단계의 사람은 감성 중심으로 생각한다. 감성적인 사람이다. 3번 단계의 사람은 지성 중심으로 생각한다. 지성적인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 가지 범주에 속한다. 4번 단계의 사람은 균형 잡힌 중심을 가지 고 산다. 5번 단계의 사람은 수정같이 명료화된 본성을 지닌다. 고등 감성 중심과 영구적 나를 지니게 된다. 6번 단계의 사람은 5번 단계의 인간이 지닌 모든 자질에 덧붙여서 고등 지성 중심과 객관적 의식을 지닌다.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유형이다. 7번 단계의 사람은 6번 단계의 사람이 갖는 모든 것 외에 모든 의식의 상태를 통제한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를 전제로 하고 에니어그램을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인간의 성격을 파악하거나 개발하는데서 그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 수준에 있어서 잠자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또는 포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성격 발달을 논해봐야, 여전히 잠자는 상태나 포로 상태 안에서 헤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니어그램은 성격심리학의 범주 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성 심리학의 체계로서 배워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굴지예프는 일찍이 말하였다. “모든 사람은 목표를 세워야 한다.” 물론 이 목표는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말함이요, 그의 가르침으로 설명하자면, 객관적 의식의 상태를 지향하며, 적어도 6번 단계 사람의 수준을 바라보며 영성 수련을 해야 할 것이다. 이 목표를 향해 감에 있어서 “의식적 노력”과 “자발적 고난”이 필요하기에 이를 꼭 배워야 함을 그는 역설한다.
영성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믿고 살지만 우리의 몸부림치는 노력 즉, 분투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분투노력과 자발적 고난을 배우며 수행해 나 갈 때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영성 신학에서 말하는 분별과 결단의 배합이라 할 수 있다.
의식적 노력과 함께 요청되는 것이 의지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세계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에니어그램을 좁은 의미에서 성격 유형을 알거나, 세계에 대한 이해나 지식은 그대로 있으면서 성격을 개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타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의 내적 개발을 추구해야 하는데 이는 지식과 존재가 동시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지식과 존재는 서로의 성장을 돕는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앞지르거나 압도하면 내적 개발은 얼마 안 가서 멈추고 만다.
자기 지식을 위하여 자기를 공부하며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위하여 세계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전체와 연결됨 없이 부분을 아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무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를 알아야 한다. 비록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닐지라도, 현재 내가 아는 것은 부분적인 것일 뿐,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아는 온전한 지식을 향하여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