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으니 성격도 동화되고 조화를 찾아 관계가 원만해졌을 것으로, 또 화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살아오면서 그때그때 해결하지 못하고 쌓여온 앙금들이 퇴직 또는 은퇴라는 가족균형의 변화를 통해 표면화 되고, 갈등이 심한 경우는 황혼이혼으로 치닫기도 한다.

2002년의 경우, 20년 이상을 살고도 이혼한 부부가 전체 이혼의 22.8%나 된다. 10년 전과 비교해 8배나 많은 수치다. 젊은 부부가 티격태격 한다면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겠거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세상을 살만치 살고 온갖 풍파를 넘었을 것 같은 노부부가 서로 사네 못 사네 한다면 아무도 좋게 보지 않는다.

세상을 사는 동안 가장 값진 것은 가족간의 이해와 사랑이다. 그러나 실제 삶에 사랑과 이해를 대입하기란 쉽지 않다. 가족간이라 할 지라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찰과 갈등을 겪게 된다. 백년해로를 약속하고 사랑의 힘으로 행복을 추구하려던 완벽한 가족의 개념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용해하려는 가족이라는 틀 속에는 자유가 있으며 그와 함께 구속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의 모든 갈등은 가족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함께 사는 사람 중에 있다. 그것은 가족 속에 얽혀있는 애증의 역사이며 벗지 못하는 인간의 원죄의 굴레이다.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비록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은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가 지키고 침범하지 말아야 할 성(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가정의 테두리 안에는 사랑과 이해, 양보와 용서 등 부부가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말들은 많다. 그러나 이 좋은 말들이 막상 감정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열 가지의 선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단 하나인 감정을 누를 힘이 없다. 성경에서는 이 감정에 빠지는 것을 시험에 든다고 한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다. 부부가 잠자는 모습이 세대별로 다르다는 것이다.

30대 부부: 둘이 마주보고 잔다.
40대 부부: 둘이다 천정을 보고 잔다.
50대 부부: 서로 등을 돌리고 잔다.
60대 부부: 각 방을 쓴다.
70대 부부: 어디서 자는지도 모른다.

그럴싸한 말이다 싶기도 하고 자기의 모습에 비추어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표현들이다. 우리 애들은 우리 부부를 보고 ‘따로 부부’라고 부른다. 일요일 교회를 가거나 외출을 함께 할 때 항상 아빠는 앞서 먼저 가고 그 뒤를 엄마가 댓발자국 뒤에서 따라 간다해서 그렇다. 미국 사람들은 노부부라 할지라도 항상 손을 꼭 잡은 채 걷고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눌 때도 그 손을 놓지 않는다는데 말이다.

중년의 위기만치나 노년의 위기도 있다. 바깥 생활에 치중하던 남편은 퇴직해 가정으로 되돌아온다. 아내의 외출을 싫어하고 간섭도 늘어난다. 부부간의 대화엔 익숙하지 않고 일방적이다. 부부가 함께할 수 있는 취미나 놀이도 없다. 자식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부부간에도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긴다. 이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하는 부부가 황혼이혼 열차를 타게 된다.

서로의 다름이나 수용하기 힘든 못마땅함도 이해하고 감쌀 수 있는 것이 가족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만이 서로의 이질감을 용해하고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끈이다. 그러나 사랑도 만병통치일 수는 없다. 사랑은 이성이기 보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결혼 초기 몇 년은 사랑으로 지탱한다 해도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일생 동안을 사랑으로 희희낙낙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허구일 수 있다.
오히려 부부간에는 이해와 관용이 버팀목이다. 이해는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관용은 나와 다른 점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오래 살면 서로 닮아간다는 말이 이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해와 관용의 가장 지름길은 체념이다. 내가 내 마음도 못 다스리는데 어떻게 저 사람이 내 맘에 꼭 들도록 행동하길 바라겠는가.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것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관문이다.

거기서 상대방의 장점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행복의 씨앗임을 알아야 한다. 몇 십 년을 함께 살면서도 항상 삐걱대는 마찰 소리를 내는 부부관계는 끝까지 이해와 관용이라는 양보를 하지 않은 상태이며 상대방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한 때문이다. 부부간에 금슬이 좋다는 것은 어떤 관계인가? 그들이 사랑만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했다고 한다면 너무 순진한 안목이다. 배우자에게 주는 선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선물은 ‘사주는’ 것이 아니라 ‘져주는’ 것이다. 행복이란 것은 자기만의 경험에 대한 느낌이요 감정이기 때문에 아무도 객관적으로 행복하다 불행하다 평가할 수 없다. 절대적으로 본인의 기준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행복, 즉 나만의 행복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 가정이다. 가족은 행복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부부의 행복은 따로따로 일 수가 없다.

순종과 인내를 여자의 미덕으로 여기는 가정문화는 더 이상 이 시대의 노인상이 아니다. 새로운 노인상이 탄생하고 있다. 인생은 자식 따로 부모 따로의 사고가 자리 잡고 있으며 젊은이들만의 핵가족뿐만 아니라 노인핵가족이 늘고 있다. 자식들의 효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자식들이 부모 걱정 안 시키고 잘 살면 그것이 가장 큰 효도이다. 늙은 비둘기 가족처럼 살아가는 백년해로부부, 이들 노인핵가족 만에서도 지키고 가려야 할 것은 있다.
마음 속에 키워온 원망과 미움의 싹을 잘라 버리고 서로를 용서하라. 용서란 말같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죽음의 상황에 서서 보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노인됨의 원숙함이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못 한 채 살아온 사람이 많다. 그러나 서로의 건강을 걱정해주는 것은 사랑의 말보다 더 강력한 애정의 표현이 될 수 있다.
함께 나들이하며 함께 외식하는 즐거움,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있다면 노년행복의 지름길이다.
호화롭고 풍요로움에 만족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간결함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줄이는 소박함이다.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빠른 길이다.
당신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을 떠나 갈 때에 얼마나 유익이 되겠는가를 생각하라.
살아본 이들이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경험으로 터득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