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신 선생은 열한살 나이인 1919년 3.1운동을 통한 시대적 어려움과 현실에 깊은 경험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을 살리는 길은 농촌계몽운동으로 가능하다며 자신의 평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다. 일본유학길에 올랐지만 학업을 중단하고 농촌운동을 지원한 YWCA의 농촌사업부 황애덕, 김활란 박사와의 연결로 두메산골 샘골로 오게 된다.

시집 안간 젊은 처녀를 보수적인 농촌 사람들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물론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키자는 설득이 쉽지 않았지만 최용신 선생은 샘골 학원을 세웠고, 일제의 눈을 속여가며 우리 한글을 배우게 하여 민족의 자존을 세웠다. 우리말 책만 가지고 다녀도 잡아가던 당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회관을 세우고 그곳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농촌주민 의식계몽운동에 힘썼다. 많은 주민들이 교육의 기회를 받을 수 있다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시대의 선구자 최용신 선생.

안산에 이사 온 지 10년. 몇년 전 저녁을 먹고 동네를 산책하다 작은 묘를 발견했다. 안산 본오동 샘골교회 한 귀퉁이 불빛도 보이지 않은 곳에 있는 선생의 묘지였다. 근처 상가 불빛 덕에 선생의 이름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 후손들의 무심함과 세월의 무상을 더욱 일깨운다. 26세 어린 나이에 민족을 위해 일하다 일제의 고문과 과로로 홀로 돌아가신 최용신 선생님.

선생님은 2005년을 사는 후배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을까? 어떻게 살라고 전하시고 싶으실까? 아마도 현재 시대 속에 지역 주민을 깨우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매진하라 하실 것 같다. 그러한 일을 하면서 편안함을 좇지 말라 하시고 안일하게 살지 말라 하실 것이다. 샘골교회 마당의 싱그런 상록수을 바라보며 최용신 선생이 하신 말을 깊이 되새겨본다.

“내 몸뚱이는 샘골 - 조선을 위해서 생긴 것이다.
그 샘골 - 조국을 위해서 잃다 죽었단들 그게 무엇이 슬프랴!
마소를 기르는 것 보다 사람을 길러야 한다.”
최용신 선생님 말씀중에서

* 참고사이트 http://sangnok.netian.com 상록수 최영신